<차상욱 논설위원>
북한의 핵실험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통일’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부의 ‘통일대박론’에 연동하는 전문가들 가운데는 확신에 가득한 어조로 2,3년 내 통일을 점치는가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현실로 등장하게 될 현안이 바로 ‘통일’이라며 격한 예언을 피력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기조의 ‘통일예언’은 남북의 긴장상태가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찌그러져 버렸다.
‘통일시대’ 또는 ‘통일시장’을 위한 흥행몰이에 한몫 단단히 했던 그들의 예언을 소위 ‘통일임박설’이라 바꿔 부른다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작금의 긴장국면 속에서도 그 예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봐야한다. 이런 예언들이 탄력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수많은 통일유형 가운데 ‘편입통일’로 이어지는 순탄한 과정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피할 수 없다면 다소 거칠더라도 감내해야할 ‘흡수통일’의 과정 또한 고려대상으로 받아들인다면 분명히 통일이 가까이 와 있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이에 통일임박의 근거를 이 땅에서 흥망을 거듭했던 왕조의 역사에서 찾아보게 된다.
육로교통이 불가한 남한을 ‘섬’이라 말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김씨가문’이 대대로 ‘수령’으로 등극하는 북한체제를 ‘왕조국가’라 부르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사극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상황이나 라말여초(羅末麗初)의 정황을 보면 북한왕조가 드러내고 있는 패망직전의 각종 증후근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왕조 말기에는 예외 없이 백성의 삶이 피폐해진다. 애초에 백성의 고단한 삶을 개선하겠다고 천명하고 그 실천방안으로 정의와 원칙을 수호할 의지로 혁명을 일으키지만, 시간이 흐르면 개국의 명분은 해괴한 모양새로 변질되고, 타성에 젖은 권력의 부패와 그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수탈은 더욱 악랄하게 만연된다. 이때, 기존질서와 체제의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부조리를 ‘개혁’하기 위해 뜻을 모으는 세력이 생겨나 피눈물 나는 설득과 실천운동을 벌여보지만, 끝내 판을 바꾸지 않으면 달라질 것이 없다고 믿는 급진‘혁명’세력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 역사의 순리였다.
신라말기,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면서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되는 현실을 개혁하려 했지만 신라의 패망은 막지 못했다. 뒤이어 개국한 ‘고려’도 말기에 이르면 무신정권과 친원파 권문세족의 전횡 속에서 하층민을 예속화하고 자영농의 몰락을 막지 못함으로써 민심이반을 가속화시켰다. 이는 위화도 회군 이후 득세한 신진 사대부의 ‘과전법’ 제정에 의한 토지개혁으로 친원파 세력을 몰락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결국 조선개국을 위해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후 수많은 농민의 봉기에도 불구하고 500여년을 이어간 ‘조선’은 말기에 이르러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감고, 개혁에 실패한 탓에 아예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사단을 내고 말았다.
당시의 사회상을 기록한 내용을 들여다보자면 세도정치 아래에서 만연된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신분제도의 대혼란을 가져왔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환곡’이라는 악행이 등장한다. 춘궁기나 흉년에 모래가 섞인 쌀을 백성들에게 빌려주고는 이듬해 수확기가 되면 햅쌀로 수십 배로 받아가는 제도가 그것이었다. 서양인들이 거대한 선박에 증기기관을 달고 태평양을 건너다니던 시절에 조선은 여전히 공자의 사당에 예를 갖추는 일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관과 권력층이 나서서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조선이라는 왕조가 망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고, 백성의 입장에서는 한편 다행스러운 역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북한 왕조를 대입시켜 보자. 공자의 사당은 전국에 깔려있는 김씨부자의 동상과 사진, 그리고 영생탑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고, 예(禮)를 가르치던 ‘논어’의 자리에는 ‘김일성교시’가 대신 들어앉았다. 핵폭탄을 만들어 놓고 선군정치를 외치는 꼬락서니는 고려시대에 원나라와 일전 불사를 외치다 망한 무신정권과 맥을 같이 한다.
외화벌이 일꾼이나 개성공단 근로자의 임금을 90%가량 착복하는 행태는 북한식 ‘환곡의 재현’이다. 평등과 공정한 분배를 기치로 내건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이념은 현실에서는 신흥부자들의 등장과 권력층의 부패로 무너진 지 오래다. 인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온 그간의 쇄국정책은 IT세상의 강력한 압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뚫리고 있다.
(후략)
출처: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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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최종편집일: 2018-01-16 10: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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